앙코르와트 가는 길, 자전거를 타고 흙길을 달리던 만화가 이우일의 모습이 떠오른다. 어떤 작가는 앙코르와트에는 과거와 미래가 공존하고 있기 때문에 누군가 여행지를 추천해달라고 하면 반드시 그곳을 가보라고 권한다던데, 나도 서른이 되기 전에는 앙코르와트의 땅을 밟고 그곳의 돌을 만지고 바람을 느끼며 해가 지는 풍경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겠지. 시엠립은 왠지 매력이 넘쳐나는 도시일 것만 같다. 가보지 않고 환상과 낭만에 사로잡히게 만드는 도시가 세계에 몇 개나 될까. 서울이 따분하다고, 정확히 말하면 서울에 사는 내 삶이 따분하다고, 느껴질 때면 이방인의 시선으로 서울을 바라보려 노력하기도 한다. 서울은 어떤 매력을 가지고 있을까. 남산을 오르며 빛과 물체가 바닥에 그려내는 그림자를 찍고 맨손으로 은행을 열심히 줍는 아주머니, 아저씨들을 보며 도와 드릴까 유혹에 빠지기도 했다. 벌써 2년 전인데 YBM에서 가르쳤던 매튜라는 학생이 밤에 친구와 길을 걷다가 정말로 은행 줍는 아주머니, 아저씨들을 도와 드렸다는 얘기가 생각난다. 외국인의 눈으로 보지 않아도 도시의 가을 속 은행 줍기는 특이하고 재미있다. 그러면서 왜 우리 나라는 대로변에 은행나무를 저리도 많이 심어놓았을까 궁금해졌다. 윤중로를 상징하는 벚꽃나무, 지천에 널린 플라타너스나무, 그리고 가을이면 빛을 발하는 은행나무. 내가 알기로 은행나무는 암수가 한몸이라 번식력이 강하다고 하는데 그것도 하나의 이유가 되는 걸까? 내가 살고 내가 사랑하는 이 도시의 조경과 수목은 어떻게 지금까지 진행되어 왔는지도 갑자기 궁금해진다.
이상은은 EBS 문화기행을 통해 스페인 여행을 다녀왔고 지식채널 출판사를 통해 '올라 스페인'이라는 여행기를 출간했다. 유명인들의 여행기는 참 부럽다. 아주 특별한 존재들의 약간 특별한 여행기라니. 남의 여행기를 통해 간접 경험하는 걸 좋아하는 편이지만 제대로 된 여행기를 찾기란 쉽지 않다. 여행기라기보다는 한 나라, 한 도시, 한 장소에 대한 심미안과 통찰력이 깃든 글이 필요한 것이다. 지하철에 오르기가 무섭게 졸린 일상인데도 활자를 읽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그 후'를 들고 다니며 읽는 와중에 소설 속에 숨겨진 나쓰메 소세키의 시대 비판 의식이 잠시 입술을 깨물게 만든다. 오르한 파묵의 '이스탄불'은 아직 끝내지 못했지만 읽다 보면 마치 그가 살던 흑백시대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든다. 어린 오르한을 추억하며 쓴 글 같다기보다는 현재 오르한이 성장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느낌이 더 강한 생생한 필체이다. 보스포루스를 바라보며 나도 배가 몇 대 지나가는지 세어 보고 싶고, 괜히 폼을 잡고 손에는 4B연필을 쥔 채 몽마르트의 화가처럼 스케치도 해 보고 싶다. 이건 또 웬 상징이람. 몽마르트의 화가라니.
아직까지는 마음껏 여행하는 자가 부럽지는 않다. 왜냐, 나도 할 수 있을 거란 희망이 있기 때문. 소소한 일상 속에서 기적적으로 나를 돕는 방향으로 일이 진행되어 가는 와중에 세상에 신이 진정 존재하는 것일까 진지하게 자문해보았다. 그와 동시에 신이 날 위해 준비한 일들을 하나하나 감사히 꺼내주는 것만 같아 혼자 착각 속에 빠져 살고 있다. 난 엄마에게도 "엄만 제일 가고 싶은 나라가 어디야?"라고 물을 만큼 이 질문을 좋아하는데 누군가 만약 나에게 저 질문을 하면 쉽게 대답하지 못할 것 같다. 가고 싶은 곳은 상당히 많지만 결국 내가 갈 곳은 정해져 있을 것만 같고, 다만 신께서 조금만 더 너그러우시다면, 내가 갈 곳에 작고 따뜻한 보금자리 하나 미리 점지해주셨으면 좋겠다.
"난 누군가(somebody)가 아니라 아무나(anybody) 사랑하는 경향이 있어"라고 수아에게 말했지만
혼자 버스를 타고 돌아오는 길, 그리고 그 후 며칠 내내
결국 난 '누군가(somebody)'를 좋아할 수밖에 없는데 관대한 척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시시껍적대면서 "난 어디든(anywhere) 갈 수 있어"라고 대범하게 말하지만
이것 또한 "난 어딘가(somewhere) 가야만 해."로 바꿔 말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